Orang’s Diary

경주 카페 늘인 : 통일전에서 만나는 여유로움

by 오랭

경주에는 통일전이라는 장소가 있다. 황리단길이나 보문과 같이 접근성이 좋은 관광지와는 다르게 거리가 좀 있다 보니 나도 자주 방문하는 장소는 아니지만, 가을이 되면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가 단풍이 들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된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면서 조만간 노란색의 향연이 펼쳐지지 않을까. 이미 은행 열매들이 바닥에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며 가을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통일전 근처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카페가 하나 있는데 바로 늘인이다.

 

늘인 (늘)

늘인은 조용한 카페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첫 방문 시에 되게 따뜻한 느낌을 받았고 일반 주택을 카페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고 건축물의 미적 감각이 도드라지는 대형 카페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나지막하고 따뜻하며 포근한 느낌을 주는 이런 카페를 계속 찾게 되는 것 같다. 현대인의 복잡하고 힘들었던 삶에 지쳐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해서일까.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에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내 마음을 달래주기에 참 좋은 곳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있고 푸른 잔디가 보이며 장독대와 커다란 나무의 배치를 통한 포근한 시골의 느낌이 드는 그런 곳.

 

늘인의 대문 앞에 서서 바라본 모습
늘인에 도착하는 순간 작은 입간판이 맞이해준다

 

어렸을 땐 가족과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던 시골에 가는 것을 참 좋아했다. 평소에 지내던 도심과는 다르게 새로운 풍경, 새로운 냄새, 새로운 것들이 가득한 시골은 호기심 많은 어린 나에게 재미있게 다가왔거든. 논 옆으로 이어진 내가 모르는 길을 따라 걷거나, 호미나 삽 같은 농사용 도구를 들고 집 밖의 흙을 단순히 계속 파내면서 구덩이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 아니면 구석에 쌓여있는 벽돌을 쌓아서 이상한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지. 모르는 길을 따라 걷다가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 실종될 수도 있었고, 구덩이를 파고 벽돌을 쌓는 것은 크게 다칠 염려가 있었다. 어렸을 때 순수했던 난 그저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이자 새로운 체험이었을 것이지만 왜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를 쳤는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는 듯하다.

 

그리고 30대가 된 지금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렇게 활동적으로 놀았던 것이 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접 만지고 느껴봤던 그런 기억들. 이래서 유년기부터 체험학습이나 여러 상황에 많이 노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나보다. 나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환경에 계속 노출되고 사회와 조금 더 가까운 위치에서 성장했더라면, 지금처럼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거나 여러 사람 사이에서 긴장하지 않았을 텐데. 특정 테두리 안에서 보호한답시고 과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나는 나 자신을 통해서 확실하게 느끼고 있고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 많이 직면하게 된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경우가 많고 때때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거나 소위 '뚝딱'거리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늘인의 바닐라 라떼와 레몬 다쿠아즈
넓은 창으로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늘인의 자리

 

하지만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내가 잘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 주어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것은 역시 언제나 옳은 말인 것 같다. '최선을 다한다'기보다는 '부단히 노력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익숙한 나. 후자의 표현이 더 마음에 들기에 부단히 노력해서 어떻게든 지금의 성향을 잘 살려가지고 뭐든 이뤄내 봐야지. 각설하고, 늘인은 그런 나의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고 편안한 시간을 가지기에 정말 좋은 것 같다. 따뜻한 느낌의 실내와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푸른 잔디와 멀리 보이는 산은 삶의 복잡함과 무거움을 조금 덜어주는 듯하다.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피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나무를 보며 가만히 멍 때리고 있기에도 참 좋다.

 

얼마 전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가수 크러쉬가 등장한 회차를 봤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beautiful이라는 OST로 큰 인기를 얻었고 나도 그 노래를 통해 알게 된 가수인데, 영상으로 본 크러쉬는 뭔가 산만하고 한 가지의 주제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하지만 2016년 멍 때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보고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에는 깊게 몰두하면서 꼭 이뤄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은 끝까지 집중해서 몰두하는 그런 사람. 어쩌면 나도 더욱 강한 집중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항상 나는 삶에서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을 지키지도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만드는 것 같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성공한 사람도 더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도 조금 더 집중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야지.

 

항상 마음이 포근해지는 늘인
따뜻한 늘인. 문을 열고 나가면 멋진 마당으로 이어진다

 

늘인은 늘인 만의 매력이 가득하다. 특히 옆집 고양이가 자주 놀러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때때로 희귀하게 오리지널 집사에게 붙잡혀서 혼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고양이가 대롱대롱 들려가는 것도 그렇게 웃길 수가 없더라. 커피의 맛도 준수하고 특히 디저트는 수제임에도 크게 흠잡을 것 없이 입안에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날씨가 좋은 날에 방문하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구름이 많은 흐린 날에 오는 것을 추천. 통일전에 방문한다면 꼭 들러볼 것을 권장해본다.

 

일교차가 큰 요즘, 은행나무가 생각보다 빨리 물들 것 같다. 단풍 시즌이 되면 황리단길이나 보문도 좋지만 통일전도 꼭 방문해보길 바란다.옆으로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가 참 장관이니까. 나도 이번 가을은 참 바빠질 것 같네.

 

 

📍Location : 늘인 (경북 경주시 칠불암길 116)
🕒 Time : 09:30~19:00 (정기휴일 없음, 18:00 라스트 오더)
🚙 Parking : 카페 바로 옆 넓은 무료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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